‘한국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인(囚人)’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리영희 선생 / 와다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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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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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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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의 30대 젊은 교수였던,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리영희 선생과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와다 교수는 원문에서 경어와 존칭을 썼지만 평어로 바꾸고 존칭은 대부분 생략했습니다. (편집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인(囚人)’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리영희 선생


 



 


 


와다 하루키 / 도쿄대 명예교수


리영희 선생의 병문안을 서울에서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한 때로부터 벌써 13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정말 감개무량하다. 나는 이미 선생보다 3년을 더 살고 있다.
선생에 관한 일이 일본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월간지 <세카이> 1974년 9월호에 논문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가 게재된 때였다. 9월호는 ‘김대중 납치 1년의 현실’이라는 특집호였는데 선생의 논문은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오다 마코토, 정경모의 논문 뒤에 실렸다. 이것은 한국 잡지 <세대>에 실렸던 논문을 당시 <세카이>의 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나중에 이와나미서점 사장 역임)가 주목해서 감히 양해를 얻지 않고 그냥 번역해서 게재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논문의 중요성을 간파한 야스에 편집장의 확실한 안목에 탄복한다.
리 선생은 이 논문에서 “일본인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우리 민족, 사회,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그해 4월에 출범한 ‘일한연대연락회의’(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운동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의 사무국장으로서 민청학련사건 재판, 김지하 사형판결에 항의하는 일본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논문에서 그다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월간지 <세카이> 1974년 9월호의 표지와 목차. 리영희의 이름과 논문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가 오른쪽 셋째 줄에 보인다.


일본인 망언에 대한 한국인 내부의 책임을 지적한 논문에 감명, 번역해 출간

내가 선생의 사상의 깊이를 안 것은 습득한 한글로 <월간 대화> 1977년 8월호에 실린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란 선생의 논문을 읽었던 때였다. 선생은 일본인이 망언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에게만 있는 것일까, 일본인이 져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책임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 없는 것일까”라고 썼다. 망언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 사회, 국가의 내부에 존재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매듭말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오늘의 결과는 해방후 32년의 역사에서 이미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않고 보내온, 그 잘못된 내적 정신과 내적 근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민족적·국가적, 그리고 국민적 자세를 엄정한 것으로 바로잡을 때, 비로소 가까이는 우리 자신의 내일과, 멀리는 우리 자손들이 타인의 모욕과 열등감에서 정말로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 방법은, 식민지주의와 제도가 우리를 부정했던, 그 부정을 이제부터라도 다시 한번 우리의 의지로 내부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리라.”
이번에는 선생의 생각이 나의 머리에 깊이 들어왔다. 일한관계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한국 지식인의 발언이다. 나는 이 논문을 번역해서 준비하고 있던 ‘월간대화 논문선’에 넣어 출판하기로 정했다.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란 이 논문은 1980년에 <한국민중의 길  정신·생활·역사>(산이치쇼보)에 수록돼 출판됐다.


<한국민중의 길 정신·생활·역사>(산이치쇼보) 표지


선생은 1974년에는 <전환시대의 논리>, 1977년 11월에는 <8억인과의 대화>로 한 시대를 긋는 저작을 잇달아 내 한국의 젊은 세대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 결과 당국으로부터는 미움을 사 1977년 11월 두 저작의 내용이 반공법 위반이라며 체포돼버렸다. 나는 1978년 2월15일 발행의 <일한연대뉴스> 40호에 ‘진실이 궤변으로 보일 때: 리영희씨와 <전환시대의 논리>’를 써서 논했다. 옥중에서 모친의 죽음을 알게 돼 사탕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눈물의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나는 문장을 이렇게 매듭했다.
“지금 박 정권은 그를 두려워해 그의 펜을 꺾고 입을 봉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1974년 다음과 같은 말은 예언의 울림이 있다.” “인간해방의 사상과 자유의 역사는 어디에서건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반복이라는 것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러하지만,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당연히도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한 나머지, 힘이 없는 소년에게 터무니없는 임무를 강요한 이 사회의 실태에는 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자신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던 것이다. 선생은 그대로 복역을 했다.
다음해 나는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소련에 장기체류하면서 연구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어 새로운 상황이 됐고 선생은 1980년초 교도소에서 나왔다. 5월에 장군들의 쿠데타로 다시 체포됐지만 김대중씨 그룹에 포함되지는 않고 7월에 석방된 것은 다행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김대중씨의 사형을 저지시켜야 한다는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달성된 후의 유화국면에서도 선생의 고난이 계속되는 것을 걱정했다.


1978년 2월15일 발행의 <일한연대뉴스> 40호에 ‘진실이 궤변으로 보일 때: 리영희씨와 <전환시대의 논리>’가 실렸다. (필자 제공)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 초빙, 주일 베트남대사관 방문에 동행


1985년이 되어 상세한 경과는 알지 못하지만, 한국에서의 요청으로 일본의 기독교도가 움직여서 나에게 리영희 선생을 도쿄대학에 초빙해줄 수 없겠느냐는 얘기가 왔다. 나는 아주 기뻐서 바로 내가 속해 있던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의 외국인 연구원으로 받아들이는 방안을 추진했다. 나의 동료이자 가장 친한 벗으로 중국 근현대정치사상 연구자인 곤도 구니야스에게 초대교수를 맡아주도록 했다.
2월 중순에 선생이 일본에 왔을 것이다. 나는 숙소가 될 도미사카기독교센터에서 선생과 부인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 부부가 도착해서 나는 전설적인 싸우는 지식인, 한국 청년 그리고 내가 경애하는 인물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선생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였지만, 얼굴에 웃음이 터지자 부드럽고 개방적인 인품이 전해졌다. 과연 이런 분이니까 그렇게 싸워온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여권을 받아 출국할 수 있었던 것을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바로 숙소 근처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선생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일본 정치가의 망언은 엄하게 비판했지만, 일본인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소학교 시대의 일본인 교사에 대해 그리움을 담아 얘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첫 방문 때는 여하튼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여러 사람과 만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선생이 누구를 만났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일본 사회를 차분히 관찰한 기회였을 것이다.
3개월 뒤 선생은 일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10월 서울로 돌아간 선생은 인편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낸 두 권 짜리 <80년대 민중·민주운동자료집>을 보내주었다.
선생과는 그후에도 오랜 우정이 이어졌다. 나중에 선생이 베트남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도쿄의 베트남대사관에 연락해 1등서기관이 만나겠다고 해서 선생과 함께 대사관을 찾았다. 이때는 베트남 방문 희망이 실현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선생은 90년대가 되어 불교계 사람들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다.

한겨레 방북취재 상담에 야스에 료스케 소개, 수갑 찬 모습 사진에 충격받아


1987년 마침내 한국의 민주화혁명이 실현됐다. 우리들도 마음속에서 기쁘게 생각했다. 선생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어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위해 크게 활동했다. 한겨레 창간 후 1년이 될 무렵 1989년 창간 1주년을 기념해 기자단을 북한에 파견하는 기획이 생겨났다. 도쿄에 온 선생에게서 상담을 받았다. 나는 그런 건이라면 이와나미서점의 야스에 료스케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바로 연락을 취했다. 선생은 야스에를 만나 기획을 얘기하고 원조를 부탁했다. 야스에는 바로 소개장을 써주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렵 문익환 목사가 정경모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는 움직임을 진행하고 있었고 3월25일 두 사람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발표됐다. 허를 찔린 한국 당국은 대항적인 보복으로서 리 선생을 체포하고 가택수색을 벌여 야스에의 소개장을 압수한 것이다. 4월14일 동아일보에 수갑을 찬 선생의 사진과 함께 큰 기사가 실렸다. 민주화를 실현했을 터인 한국의 신문에서 두 손을 묶인 선생의 사진을 봤을 때의 충격은 깊은 것이었다. 기사에는 야스에는 물론 나의 이름도, 다카사키 소지(역사학자)의 이름도 협력한 일본인으로서 거론됐다. 어떤 의미에서는 리 선생이 나의 마음속에서는 한국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인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다. 선생은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로 160일 뒤 옥에서 나왔다.


와다 하루키 선생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계기가 된 ‘21세기의 세계와 한일관계’ 심포지엄.


1990년에야 허용된 첫 한국 방문

1990년 7월22일 나는 마침내 한국에 입국하게 됐다. 동아일보가 광복 45주년, 창간 70주년을 기념해 한일심포지엄 ‘21세기의 세계와 한일관계’를 아사히신문과 공동주최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한일의 역할: 정치적 측면에서’라는 세션의 일본쪽 보고자를 맡아달라고 나에게 의뢰해온 것이다. 나를 입국시킬지 여부를 놓고 한국의 정보기관이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로 대단히 고심했다는 것은 수년 뒤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이었던 이낙연이 알려주었다. 어쨌든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돼 보고를 하면서 ‘동북아시아 인류공생의 집’을 만들자는 제안도 할 수 있었다. 꿈같은 순간이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경애하는 한국의 지식인으로 처음 만나게 된 백낙청, 김지하, 고은과 함께 리 선생이 호텔로 찾아와주어 기쁜 한때를 보냈다. 호텔을 나와서 함께 시장을 산책한 것도 행운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선생과 만났다. 선생의 자택도 방문했고 선생의 차로 한강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언젠가 선생은 “와다상, 이제 선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두세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리상”이라고 부를 마음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아시아여성기금 활동에 대한 선생의 조언 잊지 못해


마지막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8월 천안에서 열린 동아시아 지식인연대회의 때 선생이 해준 조언이다. 당시 위안부문제가 한일간의 큰 현안이 되어 있어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해서 피해여성에게 일본 국민이 낸 돈으로 보상금(속죄금)을 주고 정부자금으로 의료복지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 보상금이 ‘위로금’에 지나지 않다고 반대하고 정부자금으로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주장해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든 일본 정부의 자세를 후퇴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을 지지하는 ‘제창자’가 됐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었다. 연대회의에서 나의 보고에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나는 연구소의 소장직에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이 부담이 된 탓인지 두발이 빠져 가발을 쓰고 천안회의에 나갔다. 리 선생은 나의 세션의 사회를 해주었다. 주간 회의가 끝나고 밤에 자기 전에 선생이 “와다상, 당신은 아시아여성기금을 그만두는 쪽이 좋다. 당신의 주장을 이 나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은 고생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선생이 나의 일을 깊이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지막에는 이사, 전무이사가 되어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을 개선, 개조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96년 8월에 열린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지식인연대 심포지엄 참가자들. 앞줄 왼쪽이 필자. 당시 대학 연구소 소장이었다.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썼다. 앞줄 중앙은 안병무, 둘째줄 오른쪽 끝이 김성재, 오른쪽에서 3번째가 윤정옥, 4번째가 지명관,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리영희



나와 선생의 관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2008년 10월에는 선생에게서 자신의 삶에 대해 상세히 듣고 기록했다. 출판이 늦어져 죄송한 일이 됐다. 2010년이 되어 선생의 몸 상태가 극도로 나쁘다는 얘기를 백낙청에게서 듣고 병문안하기 위해 찾아갔다. 선생은 아주 여위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라고 생각해 선생의 손을 쥐었다가 돌아왔다.
리영희 선생은 내가 얻은 제일의 한국인 벗이었다. 선생의 일을 잊는다는 것은 절대로 없다.



                                                                                                                    [번역: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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