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텔레비전의 편견과 반지성」

언론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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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1 20:22
조회
3127

9-6. 「텔레비전의 편견과 반지성」(1972년, 전논)


 


 


나의 집 좁은 방 한구석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놓이게 된 지도 10년이 되었다. 글을 전혀 모르시는 노모(老母)가 소일거리가 없어 늘 갑갑해하시기에 자그마한 효도라고 생각하여 푼푼히 모은 원고료와 촉탁료 같은 것을 출판사에서 받아 쥔 김에 그대로 라디오가게에 들러 돈에 맞는 것을 골라 들여다놓은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에는 겨우 발을 옮겨놓을락 말락 하던 어린것이 국민학교 5학년이 되고 그 후에 난 것들이 모두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부터 나에게는 텔레비전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 늘어났다. 아내와의 승강이도 늘고 아이들의 원망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그것은 채널의 선택권을 둘러싸고 많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그러한 분쟁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고민은 아예 텔레비전이라는 ‘이기’가 과연 가정에 필요하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회의가 굳어짐에 따라서 일어나는 가족들과의 충돌 그리고 나아가서는 텔레비전그 자체의 처치에 있었다.


실제로 지난 10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4, 5년 동안, 우리집 텔레비전은 두세 번에 걸쳐 다락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지난 연말에는 아예 팔아버릴 생각으로 라디오방 주인을 불러 5만 원만 줄 작자가 나서면 팔아달라고 맡겨버렸다. 그러나 새해에 들어서 라디오방 주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10년을 쓴 것이라 3만 원 이상을 보는 작자가 없다는 것이다. 공대를 나왔다는 아주 지적으로 보이는 이 젊은 가게주인은 “몇 해 쓸 수도 없을 테니 3만 원 받고 없애기보다는 그대로 놓고 아이들에게 만화라도 보여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전문가다운 충고를 남기고 가버렸다.


글을 통한 낙도 못 찾고, 그러면서 교회나 나가보시라는 며느리의 권고도 아예 마다시는 79세의 노모가 어느 방송국에선가 하는 ‘흥부와 놀부’연속극을 밤마다 기다리는 것을 보니 이제는 3만원어치가 닳아질 때까지 놓아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10년을 묵은 고물 텔레비전을 놓고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늘면 늘었지 가시지 않는다.


나 자신은 선택적인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텔레비전과 인연을 맺지 않고 살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노인과 어린것들이 옆방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웃어댈 때에는 호기심 때문에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대개는 입맛이 쓰다. 그런 것을 보고 좋아하는 노인과 어린것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계층만이 좋아할 것 같은 것을 골라서 만들어내는 방송국에 대해서혐오감같은것이이는것도참을길이없다.“ 용케도저런것을 매주, 매일 끈질기게 만들어내는구나”하는 놀라움과 철저한 상업주의적인 소위 ‘백치화’(白痴化) 기능에 대한 두려움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상품의 광고가 쉴 새 없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저쪽에 의젓하게 차려입은 ‘신사숙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루한 설명을 끝낸 사회자가 “이번에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의 노래에서 ‘비’자를 빼고 부르는 경쟁입니다. 자 시작하십시오”하고 한 신사의 이름을 부른다. 들으면 알 만한 이름. 그 ‘지명(知名)인사’는 자신의 지능지수를 총동원하여 날갯짓까지 하면서 “나…… 야 나…… 야……”를 부른다. 그 꼴이란 보는 사람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만담이라는 것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말꼬리를 잡아 비트는 것이거나 우습지도 않은 말재주에 공연히 빽빽 소리를 지른 유형뿐인지. 그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즐거움을 느끼거나 감각과 지성이 어울려서 유쾌한 웃음이 유발되기에는 억지로 웃기려는 의도에 대한 저항감이 앞선다.


그밖에 이른바 오락물이라는 것들도 제작자와 출연자들에게는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유머감각도 에스프리도 풍자도 별로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이 그런 것을 보고 있을 때마다 괴로워진다. 어린것들의 정서와 지혜에 적극적인 도움은 못 되더라도 브라운관이 뱉어내는 저 치매증에 걸린 어른들의 지적ㆍ감성적 수준에서 굳어져버릴까 두려워서다.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분야의 전문가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장면을 좋아하는 시청자 군중을 볼 때마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 환자들을 보는 듯한 딱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런 프로그램 속에 교묘하게 엮어 넣어진 정치선전이 가장 쉽게 뚫고 들어가는 것도 이런 ‘나이 먹은 유아’들의 두개골이 아닐까 싶다.


이성적인 사회비판력 상실이라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병폐가 그 뒤에 자동적으로 따르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브라운관과 10인치의 유리창을 통해서 원거리 조작되는 지배층의 의도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이 사회의 실태를 꿰뚫고 살피려는 노력을 포기한 이와 같은 치매증 대중을 대량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듯하다.


텔레비전 방송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문화ㆍ연예물이라는 것이 철두철미 부유층 취미의 도시 중심적이고 소비문화적인 데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면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와 단층을 줄이고 메우려는 노력이 하나의 사회원리로 내세워지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온갖 문화적 노력이 오히려 그것을 넓히고 깊게 하려는 데 치중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어린이 시간’이라고 해서 화면에 나와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면 으레 무슨 사립국민학교의 악대가 아니면 무용단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높은 예능적 수준을 갖춘 소년ㆍ소녀들의 집단이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겠다. 그러나 그것은 한 국민을 형성하는 한 사회 전체 구성원의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어느 모로 보나 부당 또는 과잉하게 누리는 소수 부유층 자제들만의 것이지, 그들의 호화로운 경제적 가능성을 지탱해준 빈한한 대중의 자제들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 아닐까.


사회의 경제원리와 체제가 그러한데 텔레비전 프로에만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의 근본은 사회제도의 본질적 형태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문화 미디어를 관장한다는 전문지식인들의 그런 귀족취미와 특권층 기호에만 희열을 느끼는 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울을 불과 4, 50리 거리에 둔 농촌 국민학교에서, 크레용을 가진 아동들이 적어, 미술시간에 색칠 그림 그리기를 하지 못하고 연필로만 그리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수십만 대의 새로운 텔레비전 보급정책으로 이런 마을에도 정부가 가설하는 수상기 한 대가 설치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크레용 하나 못 사는 피폐한이 농촌마을의 어린것들에게 도시귀족이나 소시민 취향의 텔레비전 문화가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런 처지의 아이들에게 서울특별시의 특권층 부유학교 어린이들이 자랑스럽게 불어대는 몇십만 원짜리 악기는 어떤 뜻을 가질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것이라고 해버린다면 그 사회원리로 운영되는 텔레비전 문화도 그런 것이라는 한마디로 끝낼 수는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텔레비전 문화에 있는 것이기보다는 딴 데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모두가 누릴 수 없는 소수의 문화형식을 마치 그 사회의 무슨 큰 발전인 듯, 전체를 대표하는 듯 제시하려는 의도에는 반감이 앞선다. 한마디로 우리의 텔레비전 문화는 전체 사회를 식민지화한 소수의 식민수혜자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면서 기뻐지기보다는 슬퍼지니 딱한 일이다.


또 한 가지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에 우리집 식구들이 열중하는 단막 또는 연속의 사회물이 있다. 한 스토리에 주인이 있고 그에 매인 사람이 있으면 주인은 으레 서울말을 쓰고, 매인 사람은 사투리를 쓰면서 등장한다.


또 유심히 보았더니 가정극에 나오는 식모에게는 어느 도의 사투리로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사회풍자극 등에서는 건전하지 않은 행위를 하거나 수모를 당하는 역의 출신지도 대개 정해져 있고, 쾌감을 주거나 용기와 정의를 상징하는 역의 언어는 거의 예외없이 또 어느 도 사투리가 독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라디오 방송에서 한때 히트했다는「현해탄」의 주역 ‘아로운’역에서 그 독특한 사투리의 악센트가 효과를 본 탓이라면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그렇다 하더라도 번번이 거의 모든 극에서 그렇게 사투리 배치가 된다면 문제가 아닐수 없다. 만약 그것이 각본을 쓰는 이나 극을 꾸미는 책임자들 사이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 시기의 사회권력 분포를 반영한 결과라면 참으로 문제는 중대하다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역 배치와 사투리 배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족과 어린것들에게 어려운 사회과학적인 해설을 해야 할 고통을 당한다. 우리 역사 속의 사색(四色)당쟁 이야기에서 현재의 정치ㆍ경제권력의 성격까지. 그리고 일본 식민지하의 한국의 지방별 산업과 지방별 민중의 생산수단, 그 소유관계, 소작제도와 반상(班常)제도가 빈민에게 강요한 축적된 성격화 특성,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방의 민중이 그 사회제도의 소수를 위해서 어느 딴 지방의 민중보다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 결과로서 당연히 누렸어야 할 권리와 혜택에서 배제되거나 부당한 배척을 받게 되는 사회적 경향이 생겨났다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결론으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민족사회를 분열ㆍ파괴했으며 그것이 결코 인간성의 본질 문제가 아니라 다름 아닌 사회적 조건 때문이라는 사실 같은 것을 설명하자니 그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알아듣는 듯, 못 알아듣는 듯, 심지어 긴 이야기를 귀찮아 하는 듯한 어린것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원망하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문자미디어의 특성인 이성과 사고로써가 아니라 눈과 귀를 통해 호소하는 무서운 감각미디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고민하는 것이다.


사투리와 지방ㆍ도의 드라마 역 배치의 편견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사르트르가『유대인』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 문제라는 것은 사실은 유대인 문제가 아니라 ‘반(反)유대인’의 문제라고 분석한다. 유럽 사회는 유대인을 하층천민으로 둠으로써 자신들의 긴 역사를 통해 부르주아적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인 편견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만약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그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적ㆍ지방적 또는 민족적 우열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임을 논증한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와는 달리, 유대인의 성격이 반유대인주의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현상으로서는 역행적이며 세계관으로서는 전(前)논리적이다. ……유대인은 동화를 원했으며 지난 1세기 동안은 어딘가의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들을 거부했다.”


나는 이와 같은 편견을 깨우치고 바로잡는 일의 중요성을 텔레비전 방송에 기대하고 싶다. 너무도 많은 비이성과 편견이 “텔레비전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라는 ‘매스미디어 기능론’의 허울 밑에 너무도 비판받지 않은 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편견을 깨우치고 이성을 되찾는 사업은, 텔레비전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사고 형성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현실에서 볼 때 텔레비전이 회피해서는 안 될 임무이겠다.


편견과 비이성의 문제는 정치선전 드라마에서 더욱 절감된다.


언젠가 북한에 관한 드라마를 보던 어린것 가운데 하나가 “김일성(金日成)이는 머리에 뿔이 나 있다던데?”하는 의문의 반응을 보였을 때처럼 나를 놀라게 한 일은 없다.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그려내는 선전에 이의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로 양단해버리는 식의 선전은 거꾸로 우리 국민의 과학적 사고 능력과 이성을 마비시킨다. 또 모든 사물에는 가치체계의 차이에 따라 선악의 기준도 다를 수 있다는 정도의 ‘자유스러운 사고능력’마저 박탈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와 같은 흑백식 사고방식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 사회와 국민 사이에 사고와 가치관의 획일주의의 굴레를 씌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아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세력의 가치관과 이념만을 유일한 것으로 대중에게 내리 먹이려는 노력에 봉사할 뿐이겠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이 내뿜는 지나친 편견과 반지성ㆍ반이성의 독기 앞에서 오싹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이 나뿐일까 생각해본다. 전문가의 연구결과를 찾아보니, 지능과 선전수용성 사이의 역비례관계에 대해서 H.캔트릴의 전파미디어 반응연구는 ‘비판력’의 정도가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요소라고 판단했고, H.J. 베그로츠키의 연구조사 결과로도 “정치적 또는 종교적 편견에 관한 선전을 받아들이는 데 지능이 낮은 아이가 지능이 발달한 아이보다 그 수용도가 크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전문가의 연구를 빌릴 필요도 없이 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의 건전하고 폭넓은 사고능력과 비판력이야말로 가정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의 토대임을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의 지적 발육에 점점 큰 영향을 주는 텔레비전에 대해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지나친 편견의 주입과 비정상적인 정치적 선전물은 삼가주었으면 싶은 아버지로서의 간절한 희망을 말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에 텔레비전을 놓고서의 나의 고민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 『신동아』, 197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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